한국에서 나고 자라 대학생이 다 되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사람들에게 나중에 창업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듣는 질문은 변함없다. “미국에서 할거야, 한국에서 할거야?”
어렸을 때는 망설임없이 미국에서 시작할 거라고 답했다. 그러나 막상 미국 사회를 경험하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마주하고 난 지금은 무엇이 최선의 선택일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이와 관련한 고민이 들 때마다 나에 앞서 미국에서 창업을 하고, 성공의 아이콘이 된 아시아계 미국인 창업가들에 대해 찾아보곤 했다. 대표적으로 참조했던 것이 Hypen Capital에서 만든 Companies Started by Asian Americans라는 리스트.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이 리스트(그리고 추가로 몇 가지 더 좋은 글들)를 읽으며 내가 느낀 점과 내가 요즘 하고 있는 고민의 방향성에 대해 대략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Companies Started by Asian Americans 본문에 들어가면 정말 많은 회사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 중 테크와 관련있거나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케이스들 몇 개만을 필터링하여 가져와봤다.
YouTube: Steve Chen
LinkedIn: Eric Thich Vi Ly
Zoom: Eric S. Yuan
DoorDash: Tony Xu, Stanley Tang, Andy Fang - 미국판 배달의 민족, 시총 약 30조
Peloton: Yony Feng and Hisao Kushi - 운동 기구 및 미디어 회사
Pinterest: Ben Silbermann
Yahoo!: Jerry Yang
Fitbit: James Park - 한국계 미국인으로 부모님이 이민자, 웨어러블 기기 스타트업인 Fitbit을 구글에 2조원 가량에 매각
Twitch: Justin Kan and Kevin Lin
Forever 21: Do Won Chang and Jin Sook Chang - 의류 브랜드
Patreon: Sam Yam
GIPHY: Alex Chung - 움짤(GIF) 공유 플랫폼, 메타에 5600억원 가량 가격으로 매각
Webflow: Bryant Chou - Wix같은 웹사이트 제작 서비스
Gusto: Edward Kim - 클라우드 기반 급여/복리후생 관리 서비스, Edward Kim은 교포로 보여짐
Kickstarter: Perry Chen
Snapchat: Bobby Murphy
Honey: George Ruan - 온라인 쇼핑 시 숨겨진 할인 쿠폰을 보여주는 크롬 익스텐션, 페이팔에 약 5조원 매각
Airtable: Howie Liu
Notion: Ivan Zhao
Nvidia: Jensen Huang
Coursera: Andrew Ng
VSCO: Greg Lutze
Noom: Saeju Jeong - 건강관리/다이어트 앱, 한국에서도 유명한 정세주 대표
Away: Jen Rubio
Poshmark: Tracy Sun - 얼마전에 네이버가 인수한 C2C 패션 커머스 앱
Lime: Brad Bao, Adam Zhang, Charlie Gao, Toby Sun - 전동 킥보드 스타트업
Amplitude: Curtis Liu, Jeffrey Wang, Spenser Skates - 제품 애널리틱스 소프트웨어 개발 스타트업
Cruise Automation: Dan Kan - 자율주행기술 개발 스타트업, GM에 인수
WebEx: Min Zhu - 화상회의 소프트웨어, 시스코가 인수
이 리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 글이 특정 인종 혹은 문화계에 대해 다루는 만큼 최대한 신중한 접근을 하고자 했음을 밝힌다. 이번 글에서 서술하는 아시아계 미국인, 아시아인, 그리고 특정 국가 사람들에 관한 의견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닌 오로지 나의 경험에 기반한 주관이다. 더불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 개개인은 그가 특정 혈통을 타고났다는 사실만으로 일반화되어 설명될 수 없다.
대만계 미국인
유튜브, 야후!, 엔비디아, 나아가 위 리스트에는 없지만 AMD 그리고 자포스(Zappos, 온라인 신발 커머스 마켓으로 아마존이 1조원 가량에 인수)까지. 이 회사들의 공통점은 모두 기술업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기업들이라는 것과 대만계 미국인에 의해서 설립되었거나 크게 부흥한 곳들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회사들을 보면서 항상 궁금했다. 대만은 어떤 특별함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최근 들어 한국계 중에서도 미국 내에서 성공적인 기업 활동을 펼치는 케이스들이 많이 증가하고 있지만, 그들 중 아직 젠슨 황(엔비디아), 리사 수(AMD)나 제리 양(야후!)과 같은 위치에 도달한 사람들은 없다. 대만의 인구는 2400만명 가량으로 우리나라의 절반 정도이며 명목 GDP는 21위다 (한국 12위). 그렇다고 싱가포르처럼 이들의 공용어/모국어가 영어도 아니고 인구 구성이 엄청나게 국제적이지도 않다. 그러한데 어찌 이 작은 나라(심지어 한국보다도!)에서 저렇게 성공적인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창시자들이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일까.
당연히 이 모든 것이 우연이거나 잠깐의 행운일 수도 있다. 사실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마치 인도계들이 실리콘밸리에서 성공적인 이유를 설명하려 하듯이 대만계들이 유별난 까닭을 찾을 수 있다면 나는 그 내용이 무척 궁금하다.
대만이 반도체 강국이라는 점과 정부가 그러한 위상을 얻기 위해 많은 투자와 지원을 쏟은 역사를 근거로 들 수 있겠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韓 경제 절반도 안되는 대만, 반도체 기업수 2배 비결은?
유튜브, 야후!, 자포스는 반도체와 무관한 소프트웨어 기반 기업이고 젠슨 황과 리사 수 모두 반도체 분야의 인물이긴 하지만 10살도 되기 전에 미국으로 이주를 했기에 대만 본토 반도체 산업 풍토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라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혹시 이 내용과 관련해 의견이 있거나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댓글 혹은 이메일(l.deokhaeng@gmail.com)을 통해 알려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도 계속 파 보고 싶은 주제이며 (재밌는 내용이 나오면 뉴스레터 통해 공유하겠다) 나중에 전역하면 직접 대만 여행을 가서 생각해볼 계획도 있다.
칸(Kan) 형제
인터넷 방송 플랫폼인 트위치를 창업하고 아마존에 매각한 저스틴 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동생 다니엘 칸(Daniel Kan) 또한 자율주행 스타트업인 크루즈(Cruise)를 창업하고 GM에 팔아넘겼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이번 글을 작성하며 처음 알았다). 형제 둘이 테크 스타트업을 시작해 초대박을 터뜨렸으니 (트위치 매각가 약 1조원, 크루즈 매각가 약 2.5조원) 그야말로 스타트업 씬의 슈퍼스타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These 2 brothers each launched $1 billion companies in their 20s — now, Justin Kan says that their success came from how they did chores as kids
저스틴 칸과 다니엘 칸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주신 집안일을 분배하던 기억에서 좋은 기업 운영 방식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는 내용의 기사이다. 그냥 인터뷰 하다가 한 말인 것 같기도 하지만 상당히 흥미롭기도.
겸손하지 않음의 미덕
Upwind #20에서 미국에서 창업을 한 Yess.io 장지원 대표와 FiscalNote 팀 황 대표의 EO 인터뷰를 잠깐 다룬 적이 있다. 이때는 ‘아시아계 미국인 창업가’라는 테마에 크게 초점을 두지 않아 미처 발췌하지 못했는데, 저 두 분의 인터뷰 속에 아시아계가 미국에서 창업을 하는 것과 관련된 귀중한 인사이트들이 많이 담겨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오신 창업자분들을 만나보면 좋게 말해 되게 겸손(humble)한 것 같아요. 하지만 해외에서는 정말 악착같이 매달려야 되거든요. 집요하게, 무릎 꿇을 듯 달려들어야 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 데 반해 많은 분들이 서로 예의 차리면서 소프트 해지죠. (…) 저도 한국에서 보면 나대는(!) 성격으로 볼 수 있지만 미국 투자자한테 제일 많이 받은 피드백이 “넌 너무 소프트하게 이야기하고 너무 겸손하다”에요. 한국에서는 겸손한 캐릭터가 전혀 아닌데ㅎㅎ (…) 그만큼 글로벌에서는 문화가 다른 거죠. 기대치가 너무 다른 거예요. 그래서 훨씬 더 공격적으로 해야 하고, 더 집요하게 붙어야 되고.”
(…)
“저도 이번에 투자 유치 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피드백이, 트랜스포즈 파트너들이 마지막 파이널 피칭 때 저한테 “진짜 야망 있다”는 피드백들을 많이 줬어요. “ - Yess.io 장지원 대표와 센드버드 김동신 대표의 대담 중
이때 ‘당신은 미국인이 아닐 것’이라는 편견과 싸워야 했다. 일례로, 워싱턴DC에서 CEO들을 초청한 저녁 식사 자리에 초청돼 갔다. 황 대표 혼자만 아시아인이라는 걸 발견했다. 대여섯 명의 백인 CEO들이 서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지만 쌩한 분위기였다. 처음이 아니라 놀랍지 않은 반응이었다.
팀 황 대표 : “거기서 피스컬노트가 가장 큰 회사였을텐데도 특유의 ‘이너서클’이 생겼다. 내가 대단한 경영진이나 유창한 커뮤니케이터는 아니라고 어림짐작 하거나 엔지니어라 분류해버리는 시선이다. 보이지 않는 이 벽을 깨뜨리며 지난 10~15년을 보냈다. 비즈니스 생태계의 이런 문화는 엄연한 챌린지다. 때론 고독했다.” - 팀 황 FiscalNote 대표 인터뷰 중
요약하자면 아시아계 창업가가 미국에서 맞이하게 될 난관들은 본질적으로 정서적/문화적인 것들이다.
부끄러움의 극복 - 전통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유교 문화권에서는 말을 줄이고 스스로를 드높이지 않으며 겸손을 지키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애초에 잘난 척 하거나 눈에 띄게 나대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은 그 반대인 것 같다. 물론 지나치게 자기애가 강한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이 나라 사람들과 문화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풀어낼 수 있는 캐릭터를 선호한다. 22년도에 미국에 있으면서 참석한 몇 개의 네트워킹 행사(VC를 만나는 자리 등)에서 이를 뼈저리게 느꼈다. 모두가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야망을 펼치려 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혼자만 겸손하고 있으면 눈에 띄지도 않고 특별해보이지도 않는다 (중요한 인물과 기회를 놓칠 수 있다). 그렇기에 미국에서 창업을 하겠다면 겸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미덕이다. 힘들지만 이 마인드셋을 어느 정도 수용할 필요가 있고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강한 멘탈 - implicit한 차별과 선입견에도 미동하지 않기, 스스로가 스스로를 외부인(alien)이라 규정하고 제한을 걸지 않기, 자신이 할 수 있을 것임을 진심으로 믿기
이 난관들을 확실하게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미국의 문을 두들겨봐도 좋을 것이다.
추가로 미국 사회가 지니고 있는 일하는 방식의 특징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차트메트릭 조성문 대표님의 블로그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본인이 겪은 실제 일화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하고 우리 사회와의 차이점도 확연하게 느껴진다.
미국에서 해야 하는 것인가?
결국 미국에서 창업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내가 잘하는 것을 할 것인가, 하고 싶은 것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작년 여름 만났던 멘토 분은 내게 창업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창업을 하는 것은 남의 돈(투자자)을 빌려 남의 인생(내가 고용할 직원들)을 책임지는 일이기 때문에 무조건 잘해야만 한다고. 이전까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직까지 내게 있어 미국에서 창업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그곳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정말 세계적인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의미이고 보상 또한 엄청나게 달콤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 바로 위에 적은 여건들(부끄러움의 극복, 강한 멘탈)을 스스로가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체류 문제 해결 및 현지에서의 컨넥션 강화 또한 더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 창업하는 것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다. 한국의 사회 상황과 문화에 익숙하고,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으며 언어 장벽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하는 도전보다 심리적으로 덜 쫄린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 때문에 이곳에서 창업을 하게 된다면 많은 아쉬움이 생길 듯 하다. 글로벌 서비스를 만들어 보겠다는 꿈 (물론 한국에서 시작하여 글로벌 서비스를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이것은 오늘 글의 주제와 약간 다른 이야기다)이나 세상 다양한 구석에서 모인 실력자들과 함께 멋진 일을 해보겠다는 꿈을 잠시 접어둬야 할 것이기에.
그래서 아직 나는 “어디에서 창업을 할래?”라는 질문에 대해 뚜렷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실제로 창업을 해야 하겠다는 결단이 서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경험과 배움을 통해 미국에서 창업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일치할 수 있기를 바라는 수 밖에. 물론 막상 내가 창업을하는 순간이 왔을 때에는 아예 다른 사고의 프레임을 이용하고 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