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일하던 회사 대표님과 잠시 면담할 일이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대표님이 중간에 삼국지 이야기를 꺼내셨다.
“유비, 조조, 손권 중에 어떤 사람을 닮고 싶은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조조랑 유비를 좋아하는데, 되고 싶은 모습은 조조이지만 결국 유비를 닮아갈 것 같아요, 하면서. 대표님께서는 특유의 인자한 웃음을 보이시면서 유비가 대단한 인물인 이유는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갔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사실 이 지점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하면서 듣고 있었다. 당시의 유비에게 그만큼 필요한 인물이 제갈량이었으니, 아쉬운 사람이 간절해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니었겠는가.
“유비는 황제의 숙부 뻘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황숙이라고 칭했어. 그 핏줄과 명분은 조조와 손권에게 없는 것이었고, 어떻게 보면 자존심이 정말 강할 사람이었지… 그렇게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유비가 한 초야의 선비를 자기보다 위로 인정하고 숙이고 들어간거야.”
오, 순간 들으면서 깜짝 놀랐다. 정사(正史)와 일치하든 아니든 간에, 유비가 자존심이 세고 스스로를 높은 사람으로 여기는 타입일거라는 생각은 한번도 안해본 터라. 내가 읽었던 삼국지에서 유비는 항상 약간 쭈굴쭈굴하고 지나치게 겸손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만약 유비가 내가 생각하던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제갈량을 삼고초려한 것은 유비에게 있어 큰 결심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내가 딱 자존심이 세고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높아서 잘 안다. 나 같은 사람은 남을 잘 인정하지 않고, 설령 남을 인정하더라도 웬만해선 그 사람한테 고개 숙이는 일까지 벌이진 않는다. 실제로 고등학교, 대학교 때도 그랬다. 명확히 나보다 뛰어난 친구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칭찬하거나 그로부터 배우려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큰 소리 치며 나를 더 크게 포장하고자 할 뿐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내 자신의 오만함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동안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내가 유비와 동일한 상황에 놓였다면 나는 제갈량에게 퇴짜 맞은 1트에서 화를 참지 못하고 돌아선 다음 영영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촉의 황위에 오르는 일 또한 영원히 없었을 것이고.
그날 이후로 내 관심사는 한동안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만났을 때 기꺼이 숙이고 모셔올 수 있는, 유비의 태도”를 지니는 것에 머물렀다. 이른바 유비 멘탈리티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만나면 자존심 접어두고 무조건 배우는 자의 자세를 갖추기
당장 내가 주인공이 되려 하지 말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큰 일의 측면에서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하기
그런데 이걸로 충분하지 않다. 내가 나의 제갈량을 만났고, 그를 내 밑으로 데려오려 한들, 그가 나에게 올 이유가 있는가? 어떻게 하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나를 위해 일하게 만들 수 있는가?
이 질문의 답은 얼마전
과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었다.“너는 너보다 똑똑한 사람 10명을 너 부하 직원으로 만들 수 있어?”
도엽은 저것이 성공하는 사람의 첫 번째 조건이라고 말했다. 결국 스타트업은 팀이 너무 너무 너무 중요하고, 좋은 팀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대표가 정말 뛰어난 인재들을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도엽의 질문에 곰곰히 생각해봤다. 나는 언제 누군가를 위해 일할 마음이 생겼던가, 어떤 사람 정도면 내 대장이 될 수 있나.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prestige보다 그릇이 깊은 사람이 되면 그렇게 할 수 있을 듯.”
prestige라 하면 그 사람이 줄줄이 달고 있는 타이틀들을 말한다. 어떤 대학을 나와서 어디에서 몇 년을 일했고, 어떤 이력을 가지고 있고…prestige가 깊은 사람은 링크드인 프로필을 들여다 봤을 때 입이 쩍 벌어지는 사람이다. 그러나 A, S급 인재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prestige는 별 효용이 없다. 어차피 주위에 그런 사람들로 차고 넘칠 테니. 그러니 “나 이런 직장에서 몇 년 일한 사람이야! 나를 위해 일하면 성공할거야.” 라며 접근하는 시도는 진부하고 설득력 없게 여겨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릇은 다른 문제다. 사람의 그릇이 깊다는 건 무슨 소릴까. 사실 나도 명확히 정의하진 못하겠다. 그릇이 깊은 사람은 여유가 넘치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깊은 생각이 담겨 있음이 보이는 사람이다. 같이 길을 떠났을 때 아주 멀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을 주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산전수전과 사색, 그리고 수많은 경험이 합쳐져 만들어진다. 무엇보다 세상과 주류가 바라는 길을 걷지 않고 정말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걸은 사람들이 깊은 그릇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인재들은 이러한 준비가 된 자에게 끌린다.
What I Worked On - Paul Graham
내가 정말 좋아하는 폴 그레이엄의 에세이이며, ‘그릇이 깊어지는 삶’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시다. 폴은 대학 공부를 더러 하다가도 인공지능에 관심이 생겨 그쪽 분야로 대학원을 진학했고, 그러던 와중 예전에 그리던 그림에 열정이 다시 생겨 이탈리아 아트스쿨로 가서 그림 공부를 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창업을 해서 성공했고, 결국에는 YC를 시작하며 수많은 스타트업들의 대부가 되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폴이 YC를 성공적으로 키워낼 수 있었던 건 그의 독특한 삶의 궤적과 그릇 덕분이다. 머리가 비상하고 야망으로 가득찬 젊은이들 앞에, 흔해빠진 엘리트처럼 살지 않은 한 모험적이면서도 현명한 멘토가 찾아와 함께 세상을 바꿔보자고 말한다. 그 어떤 창업가가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prestige보다 그릇을 쫓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그렇게 살고자 한다. 물론 그릇을 쫓다 보니 자연스레 prestigious 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 둘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본질은 무언가가 화려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추구하지 말 것, 다양한 경험을 하고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체감해 볼 것, 내 마음과 직관을 따를 것, 항상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것, 그리고 빼어난 인재를 알아보고 인정하는 것에 있다.
그렇게 해서 그릇이 깊은 사람이 된다면 제갈량 10명을 나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고, 세상을 뒤엎는 대업을 이룰 수 있다.
이렇게 완성되는 것이 유비 멘탈리티다.
"그릇이 깊은 사람은 여유가 넘치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깊은 생각이 담겨 있음이 보이는 사람이다. 같이 길을 떠났을 때 아주 멀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을 주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산전수전과 사색, 그리고 수많은 경험이 합쳐져 만들어진다. 무엇보다 세상과 주류가 바라는 길을 걷지 않고 정말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걸은 사람들이 깊은 그릇을 지니게 된다"
-> 너무 좋다. 잡스가 말한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랑 일맥상통하는 듯.
남들의 시선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본인의 길을 창조하여 오롯이 걸어가야겠지. 화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