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wind #20 - 문제에 대한 집착, 글 쓰는 VC들, 좋은 기업과 위대한 기업, 롱테일 엔터테인먼트, GPT가 만드는 인터넷 등등
날씨가 슬슬 더워지는 것 같아요.
매주 뉴스레터를 쓸 준비를 하기 위해 틈틈이 흥미로운 소재들을 찾아 인터넷을 돌아다닌다. 그럴때마다 느끼는 건데, 요즘 시대에 ‘큐레이션’에 대한 수요가 정말 크게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많은 뉴스레터나 인사이트 제공자들을 구독하고, ‘xxx하는 글들 모음’, ‘xxx을 할 수 있는 깃허브 레포 모음’ 등이 링크드인이나 트위터에서는 큰 인기를 끈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정보가 너무 많아지다보니 발생한 현상이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인터넷 초창기 시대에도 이런 모습을 보였다. 야후!같은 포털 사이트들은 본질적으로 큐레이션의 집합체였다. 몇 안되는 웹 페이지들을 여러 카테고리로 분류해놓고, 이용자들이 카테고리를 타고 타고 들어가면 자신한테 필요한 웹 페이지를 찾을 수 있게 서비스를 제공했다 (비즈니스 - 투자 - 자원 섹터… 해서 쭉쭉 들어가면 그것과 관련된 웹 페이지 링크들을 표시).
사람들이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고, 웹에 흩어져 있는 웹 페이지들이 희소해서 그것을 일일이 찾아다니기 어려우니까 이런 디렉토리형 포털 사이트들이 성행한 것이다. 재미있다. 우리는 웹 페이지가 너무 적게 존재했을 때에도 큐레이션을 필요로 했고, 이제는 웹 페이지가 너무 많아지니 또 다시 큐레이션을 향해 눈길을 돌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적은 것과 너무 많은 것은 큰 의미에서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고,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쓰는 것과 같은 뉴스레터, 그리고 정보 큐레이션을 기반으로 한 크리에이터들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지리라 믿는다. 그 기저에 동작하고 있는 것이 GPT이든 인간 지성이든간에, 사람들의 마음에 쏙 드는 정보를 배달해주는 장치는 큰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런 미래를 대비하며, 앞으로도 더욱 정성을 다해 좋은 글들을 구독자 분들께 전해드리겠다. 당장 이번주 내용부터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문제에 대한 집착
스타트업 전문 미디어 회사인 eo가 운영하는 eo플래닛에는 멋진 읽을거리들이 많다. eo가 그냥 영상 컨텐츠만 만들었을 때는 긴 영상을 다 보는 게 귀찮아서 클릭하지 않을 때가 많았는데, 이젠 eo플래닛에 영상과 더불어 스크립트까지 같이 올려줘서 인터뷰 기사 읽듯이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오늘 소개할 글도 그런 인터뷰 중 하나인데, 센드버드 김동신 대표와 Yess.io 장지원 대표의 대담이다.
1조 창업가의 CEO 멘토링ㅣ센드버드 김동신 x Yess 장지원 [전문]
김동신 대표가 남기는 코멘트들이 하나하나 정말 알찬데, 이 중 유독 내 마음에 깊이 와닿았던 것들이 몇 개 있다.
“고객과의 대화를 정석대로 하고 계신 것 같아요. (고객과의 대화를 통해) 제품과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문제랑 사랑에 빠져야 되는 거잖아요. 그 문제를 더 깊이 있게 이해하다 보면 제품 방향성이 바뀌게 되는데, 고객이 틀린 게 아니라 우리 솔루션이 고객에 맞는 방향으로 진화를 해 나가는 과정을 잘 헤쳐나가고 계신 것 같고.
“많은 창업가들이 의외로 고객과 인터뷰를 하면서 동기부여를 잃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생각했던 나의 아이디어, 나의 고객은 이런 모습이 아닌데 하면서 고객들에게 실망을 하고. 이 제품을 안 만들고 싶다고 하시는 경우도 있고. 내가 만들고 싶은 제품과 시장이 너무 안 맞는 거죠. 그 제품(과 아이디어)을 지키기 위해서 시장을 버리는 분들도 계세요.”
나는 이전에 몇 가지의 아이템을 실험해보면서 사용자들과 대화를 해 보고, 동기부여를 잃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다. 정말 딱 위 문장이 표현하는대로 내 아이디어를 지키기 위해 시장을 부정하고,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건 좋은 대처가 아니었던 거다. 나의 고객이 이런 모습이 아니구나 싶으면 나의 고객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더욱 똑바로 바라보려 노력하고, 아이디어를 과감히 버려서라도 시장을 찾아야 했던 거다.
사실은 이걸 알면서도 이 과정을 거치는 것이 정말 고통스러울 것이라 생각해서 실행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위 김동신 대표의 말이 내 생각을 많이 바꿔놓았다. 고통스러울 것이 뭐가 있겠나, 제품을 버리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러면서 문제와 더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건데.
여러모로 뼈를 때리면서도 위안과 용기를 주는 말이었다.
글 쓰는 VC들
작년 여름에 ‘앞으로 VC들이 어떻게 발전해 나갈까’를 염두에 두고 짧막하게 진행한 리서치가 있었다. 거기서 말한 것 중 하나가 web3 트렌드와 더불어 VC들이 온라인에서 글을 많이 쓰며 스타트업계 내에서 자기 하우스를 브랜딩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점이었는데, 요즘 그런 경향이 한국 내에서 더더욱 많이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최근 베이스 인베스트먼트와 패스트 벤처스에서 글을 많이 쓰고 있다. 이 회사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블로그나 Thoughts 섹션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회사 내부인이나 심사역들이 자신들이 체결시킨 딜이나 산업 트렌드에 대한 생각들을 장문으로 적어놓은 것들이 올라와 있는 것.
특히 베이스 인베스트먼트에서 Thoughts 섹션에 공개하는 투자 비하인드 스토리와 포트폴리오사 소개에 좋은 내용들이 많다. 가장 인상깊게 본 건 팀러너스 투자 메모다. 팀러너스는 생성형 AI 스타트업인데, 토스의 성장을 견인한 공신 중 한 명인 정승진 님이 시작한 곳이다 (이전에 ‘유난한 도전’ 뉴스레터에서 짧게 언급하기도 했다).
정승진님이 팀러너스를 시작하기 이전의 과정을 묘사한 문장이 기억에 꽂혔다.
듣자하니 정승진 대표님은 토스 퇴사 직후 법인을 설립하셨는데, ‘창업이 정말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인가?’란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6개월간 세계를 돌며 원없이 놀다 오셨고, 결과적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 인생에서 제일 재미있고, 창업은 그것을 평생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는 결론을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드라마틱하면서도 낭만적인 이야기인가? 나도 저런 판단을 내리고 싶고, 저런 썰을 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여튼 이런 에피소드가 실려있을 정도로 베이스 Thoughts 에 있는 글들은 스타트업계의 현장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창업에 임하는 자세
얼마전 나랑 비슷한 기간에 걸쳐 군복무를 하고 있는 고등학교 선배
과 전화 통화를 할 일이 있었다 (도엽도 Substack을 운영하고 있는데 좋은 글들 많이 올라오니까 구독해보시길). 전화하면서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이 오고갔는데, 그 중에서 기억에 남은 것 중에 '위대한 기업’과 '좋은 기업’에 대한 분석이 있었다. 사실 내가 평상시에 은연 중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는데 도엽과 대화하다보니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가 된 것 같다. 이래서 고퀄리티 대화는 살아가면서 자주 하는 것이 좋다.좋은 기업: 시장에 후행, 사람들을 관찰하여 무엇이 문제일지를 파악, 문제에 집착, 미드 리스크 미드 리턴. 현 시점 대부분의 성공한 스타트업 창업자들. ‘사업가적’ 태도.
위대한 기업: 시장에 선행, ‘사람들은 보여주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마인드셋, 자신이 상상한 ‘세상은 이래야 한다’ 버전과 지금 세상을 비교해서 빠져 있는 것을 만듦, 제품에 집착,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극소수의 창업가들-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샘 알트만 등. ‘예술가적’ 태도.
우리들은 이 둘 중 어느 카테고리에 포함되게 될까. 좋은 기업을 세우는 사람은 부자가 될 것이고 위대한 기업을 세우는 사람은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물론 둘 중 하나라도 되는 것은 무지 어려워서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하지만.
롱테일 엔터테인먼트
음악계에 ‘인디 중산층’이라는 아티스트들이 뜬다는 내용을 담은 기사를 접했다. 사실 21년도 기사라 outdated되긴 했는데, 오늘날에도 유효한 인사이트가 하나 있는 것 같아서 가져와봤다.
히트곡 없이도 꾸준히… 월 수백만원 버는 ‘인디 중산층’ 뜬다
기사에서 말하는 ‘인디 중산층’은 월 200~1000만원의 수익을 거두는 인디 아티스트들로, 메가 히트곡 하나에 의존하지 않고도 꾸준히 신곡을 발매하며 활동하는 이들을 뜻한다. 기사에서 예시로 든 사람들은 이강승, 나이트오프 등이 있는데 요즘은 더 늘어났을 듯 하다 (박소은, 허회경?).
어쩌다 이런 인디 중산층들이 부상하게 되었느냐, 에 대한 이유로 기사는 ‘음악 감상 형태의 변화’를 들고 있다.
근 2, 3년 새 국내 음원 소비는 인기 차트 중심주의를 빠르게 탈피했다. 두세 시간짜리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라디오처럼 틀어두고 듣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 ‘잔잔한 카페 음악’ ‘감성 저격 인디 음악’ 등의 재생 목록이 인기를 얻고, 그 수익 정산 시스템도 투명해졌다. 분위기 좋고 잔잔한 곡 서너 개가 수만∼수십만 구독자의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되면 꾸준히 음원 수익이 정산돼 통장에 들어온다.
블록체인 같은 최첨단 신기술의 등장이 아니다. UI와 UX의 변화가, 시대의 흐름과 맞아떨어져서 만들어낸 변화이다. 누군가는 롱테일이 환상이라고 하지만, 난 이렇게 사람들에게 다양한 스펙트럼의 취향만 잘 제시해주는 도구가 있다면 롱테일이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반에서 유의미한 파급력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음악 뿐만이 아니라 영화, 책, 글, 소셜 미디어 컨텐츠에서도 이러한 변혁이 일어나야 한다. 당장 Substack 같은 경우도 텍스트 기반 크리에이터 시장에서 롱테일 현상을 촉진시키고 있는 것 아니겠나.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런 롱테일 엔터테인먼트 쪽에는 분명 상당한 기회가 있다. 나도 언젠가 도전해보고 싶은 영역이다.
과포화 인터넷
그래도 명색이 뉴스레터인데 GPT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에 친구가 보내준 영상 하나를 공유한다.
영상의 요지는 GPT와 노코드 툴들을 적절히 사용하면 특정 주제에 대한 고퀄리티 글들로 가득찬 블로그를 찍어내듯이 자동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부업으로 저런 GPT 기반 블로그 돌리는 사람들 많아지게 될 건 뻔하다. 블로그 여러 개 만들면서 SEO 최적화 시켜놓고 광고 붙이면 얼마나 마진이 남을지는 몰라도 일단은 돈이 될 테니까.
거꾸로 말하면 앞으로 인터넷 컨텐츠가 정말 과포화가 될 것이라는 소리기도 하다. 지금도 정말 빠른 속도로 매 순간마다 새로운 웹 페이지들이 생겨나고 있는데, 여기에 AI까지 가세하게 된다면…
그렇기에 더욱 앞으로 사람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웹 페이지를 보여주는 맞춤형 검색이나 큐레이션형 검색의 중요도가 높아질 것이다. 훌륭한 큐레이션 엔진이 등장하게 된다면 바로 위에서 언급한 롱테일 인터넷 소비 문화를 조성할지도 모르겠다. 과포화 인터넷, 큐레이션, 롱테일… 모든 것이 다 연결된다.
기타
미국 SEC에서 회사들의 공시 자료를 받아볼 수 있게 제공하는 API가 있는 것을 아는가? 이런 것을 GPT랑 조합해서 만든 서비스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명 투자자를 위한 AI. 복잡한 회사들의 재무 상태나 사업 계획서를 이해하기 쉽게 요약해서 보여주는 거다.
EdgarGPT
Feather - The Bloomberg Terminal for retail traders (YC 23)
특히 이중 Feather이라는 서비스를 만든 공동창업자의 이력이 특이하다. Ash Rai라는 사람은 밴더빌트 재학 중 자기 기숙사 방에서 총 가치가 $1M에 이르는 헤지펀드를 일구어냈다고 한다. 대단할 뿐이다. 역시 무언가 한 분야에서 큰 성취를 이루는 사람은 뭐든 해낼 수 있다.최근에 포브스가 선정한 한국 1위 부자로 MBK 파트너스 김병주 대표가 뽑혔다. 김병주 대표가 투자자들에게 보낸 편지:
한국 1위 부자 김병주가 투자자들에게 보낸 편지[번역 전문]
요즘에는 웬만한 스타트업 창업가보다 사모펀드/초대형 VC/자산운용사 굴리는 사람이 세상에 더 끼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이해해가고 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의 정의를 더욱 명확히 할 필요가 있는 시점.GPT가 뜨면서 GPT에 입력할 Prompt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이에 사용자의 상황에 가장 적절한 Prompt를 추천/검색해주는 엔진 또한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분야에서 가장 큰 성과를 내는 기업이 큰 돈을 벌 것 같다.
최근에 깃허브에서 인기를 끌었던 프로젝트 중 AutoGPT라는 것이 있다. 스스로 지식을 학습할 수 있는 GPT를 누가 만든 건데, GPT한테 학습할 지식에 대한 토픽을 던져주면 GPT가 알아서 구글 검색을 해서 찾은 결과들을 스스로에게 트레이닝시킨다. 들어가보면 실제로 작동하는 영상도 있는 흥미롭다. 이처럼 최신 기술 트렌드를 알고 싶다면 깃허브 인기 Repo 순위를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일전에 소프트뱅크벤처스 매각설이 돌았었는데, 결국 매각을 하긴 했다. 근데 손정의 동생 손태장에게. 손태장도 찾아보니 재밌는 인생사를 지닌 사람이다.
eo플래닛에 올라온 또다른 좋은 글 중 하나다. FiscalNote를 창업한 팀 황의 이야기인데, 한국계 미국인이 미국에서 창업을 하는 것에 대한 고충을 잘 그려내고 있다.창업을 희망하는 아시아인 유학생의 입장에서, 현실적인 롤모델로 삼기에 좋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도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AI -> AI 프롬프트를 생성해주는 AI -> AI 프롬프트를 생성해주는 AI를 생성해주는 AI . . . 결국 스스로 학습하는 AI로 수렴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자아라는 것이 생길지도? AI 러다이트 운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최근 링크드인에서 AI생성이미지를 쓰지말아달라고 호소하는 그래픽디자이너를 우연히 본적이 있는데 산업혁명때의 역사가 반복되는 느낌을 받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