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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 기업이 있다. 바로 Epic Systems라는 곳인데, 나는 이곳을 ‘미국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의 이무기’라고 칭하고 싶다. 아마 이쪽 분야에 관심이 없는 한국 사람이라면 처음 듣는 회사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최소한 나는 미국 땅 밟기 전까지 이 회사 전혀 몰랐다). Epic Systems는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도 아니고 나스닥이나 뉴욕증시에 상장된 공개 기업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Epic은 디지털 헬스케어 scene에 1979년부터 자리하고 있었고 연매출이 수조원에 달한다. 최근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의 협업 소식을 발표하며 자사의 서비스 내에 GPT 기술을 도입할 것임을 알리기도 했다.
Microsoft and Epic expand strategic collaboration with integration of Azure OpenAI Service
어떤가, 이 회사가 무엇을 하는 곳이며 누구에 의해 세워졌고, 나는 왜 이곳이 ‘이무기’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번주 Upwind에서는 Epic Systems에 대해 내가 개인적으로 조사한 내용들을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Epic Systems, 1979년 Judith Faulkner (UW Madison 동문) 창업. Private Company (IPO 하지 않음).
무엇을 하는 회사인가?
주 사업분야는 EHR(Electronic Health Record)/EMR(Electronic Medical Record)로, 병원들이 환자의 의료 기록을 전산화해서 저장/조회/분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해서 판매한다. 이것 이외에도 비대면 진료, 병원 재무 관리 소프트웨어, 의료 서비스 특화 CRM 등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 다방면의 제품을 보유하고 있다. 사실상 병원과 관련된 모든 디지털 분야에서 Horizontal/Vertical Integration을 이뤄냈다고 할 수 있겠으며, 보다 세부적인 제품군 리스트는 공식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볼 수 있다.돈은 잘 버는가?
이번 글을 작성하면서 제일 도움을 많이 얻은 것은 Forbes에서 2021년에 작성했던 Epic Systems 심층 취재 기사였다.
The Billionaire Who Controls Your Medical Records
해당 기사에 의하면 Epic Systems의 20년도 매출은 $3.3B(현재 환율로 한화 약 4.4조원)이다. 21년도 매출은 13% 증가한 $3.8B(한화 약 5조원). 22년도 매출은 아직 소스들마다 하는 이야기가 조금씩 다른데, Forbes에 따르면 $4.6B(한화 약 6.1조원) 정도라고 한다. 21년도 기준으로 Epic Systems는 부채가 없으며, EBIDTA 기준 현금흐름이 매출액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즉 돈을 아주 잘 벌고 있는 회사라고 볼 수 있다. 창업자인 Judith Faulkner는 이 회사 지분을 47%나 보유하고 있는데, 그 덕분에 현재 $7.1B(한화 약 9.5조원) 상당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Forbes Billionaires Ranking 325위에 자리하고 있다.경쟁자는 어떻게 되는가? 시장에서의 위치는?
미국 내 EHR 시장에서는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전통적 강자이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대략 30% 안팍의 시장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듯 하고, 가장 강한 경쟁자는 20~25% 정도의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는 Cerner이다. 이 Cerner라는 회사도 상당히 눈여겨볼만한데, 무엇보다 22년도에 빅테크 기업 중 하나인 오라클에 인수당한 점이 흥미롭다. 가격은 무려 283억 달러(한화 약 33조원)로, 이는 오라클 역사상 최대 규모의 M&A라고도.
신기하게도 EHR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Epic이 우세한데, 매출만 놓고 보면 Cerner가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 21년도 매출이 $5.7B(한화 약 7.6조원). 이 지점을 자세히 분석해 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조사할 예정.
Cerner (CERN) Q4 Earnings Surpass Estimates, Revenues Miss창업 스토리는 어떻게 되는가?
Faulkner의 창업기에는 그렇게 특별한 점이 있지는 않다. 어렸을때부터 쭉 컴퓨터와 문제 해결에 관심을 보이다가 1965년에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컴퓨터 과학 박사 학위 과정을 시작하게 된다. 박사 과정 도중인 1969년, 의사들의 스케줄을 편리하게 짜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때부터 헬스케어 분야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이후 박사 학위 과정을 졸업한 뒤, 70년대에는 의사들의 환자 정보를 저장해주는 시스템을 개발한다. 물론 이때도 바로 창업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고, 몇 년 동안은 망설이고 고민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다 바야흐로 1979년에, 집 지하실에서 1과 1/2명분의 직원으로 Epic Systems를 시작한다 (한명이 프리랜서형태로 고용된 것이라 사실상 혼자 시작한 것이라고 봐도 된다).
기타 특이점
반-실리콘밸리적 문화(캘리포니아/시애틀/뉴욕이 아닌 위스콘신 평원 한복판에 위치한 본사 캠퍼스, 딱봐도 2000년대 초반 느낌이 나는 사이트 디자인과 UI를 아직까지도 고수 중, 사용하는 기술 스택 또한 최신 웹 스택과 동떨어져 있음 등)를 지니고 있다고 할 정도로 오늘날 성공한 테크 기업들과는 다른 체질을 지니고 있다. 월가나 실리콘밸리의 투자사들로부터 많은 투자 요청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했고, Judith Faulkner가 기업공개나 매각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폐쇄적인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분 보유율 동안 거의 50%에 육박하는 것으로 보아 회사 내에서의 의결권과 영향력 또한 막대할 것이다. 국내 기업으로 치자면 스마일게이트같은 모습이다.
[Who Is ?] 권혁빈 스마일게이트그룹 최고비전제시책임자
그렇다면 나는 어쩌다 이곳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느냐 하면, 내가 직접 Epic의 서비스를 사용해본 적이 있다. Epic에서 만드는 제품 중에 MyChart라는 것이 있다. 일종의 원스탑 진료 예약-결과 확인-환자 정보 조회 프로그램인데, 각 의료 기관은 자기만의 MyChart를 게임 서버 열듯이 가지게 된다 (xx 병원 MyChart, xxx 대학병원 MyChart 이런 식으로). 우리 학교 병원도 MyChart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학교 의료 시설을 통해 간단한 진료를 받거나 코로나 검사 등을 할 때 이 MyChart를 이용해서 접수하고 검진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서비스에 대한 첫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UI 디자인이 좀 투박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용하다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서비스 흐름이 매끄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복잡한 본인인증 필요 없이도 내 검사 결과들을 기숙사 방에서 손쉽게 조회하는 경험 (한국에서는 한번도 해본 적 없는 경험이었다)을 하고 나자 이 서비스를 만든 회사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럼 Epic Systems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파악했으니 좀 더 세밀한 분석을 해보도록 하겠다.
어떻게 돈을 이리 많이 버는 것일까?
Epic의 사업은 기본적으로 B2B/SI 비즈니스라고 할 수 있다. 환자를 End User라고 생각했을 때, 이들에게 이용 요금을 받지는 않고 Epic이 제공하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하는 병원 측과 계약을 맺는다. 사실 이는 추측이긴 한데…Epic이 공개 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수익 구조를 자세히 살펴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제일 근접한 방법은 규모 면에서나 시장 점유율 면에서나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경쟁사인 Cerner의 사업 보고서를 읽어보는 것이었다.
위에 Revenue by Business Models라고 적혀있는데, 죄다 B2B 모델이다. 비중으로 쳤을 때 탑3는 Professional services, Managed services, 그리고 Licensed software. Professional Services는 사실상 SI다. 고객들의 니즈에 맞게 소프트웨어를 제작해주고 시스템을 적용해주며 컨설팅을 진행하는 모델. Managed services는 약간 클라우드같은건데, 병원 대신에 자사 제품을 설치해서 돌릴 하드웨어를 제공하고 그 요금을 가져간다 (이런 면에서 Cerner가오라클과 시너지가 있을 듯). 마지막으로 Licensed software는 자신들이 제작하고 판매한 소프트웨어에 대한 라이센스비를 거두는 것이다.
Epic의 비즈니스 모델 또한 Cerner가 영위하는 사업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즉 B2B 중심일 것이라는 이야기). 그렇다고 가정을 했을 때, Epic이 병원을 대상으로 하는 B2B 사업에서 조 단위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크게 세 가지를 꼽아봤다.
미국 의료 시장
미국은 병원이 하나의 회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돈을 엄청 많이 번다. 나도 이번에 조사하면서 알고 깜짝 놀랐다 (애초에 미국은 한국만큼 국민 건강 보험 체제가 잘 안 잡혀 있는 만큼 병원비가 무지막지하게 드니까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부분이긴 했지만). 미국 병원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눠질 수 있는데, 영리병원(for-profit hospital)/비영리병원(non-profit hospital)/공공병원(government hospital)이다.
영리병원은 말 그대로 회사라고 생각하면 된다. 상장을 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사모펀드에서 사고팔 때도 있다. 즉 수익성을 목적으로 하는 대형 의료기관. 공공병원은 연방 정부나 주 정부에서 소외계층을 지원할 목적으로 운영하는 병원이다. 살짝 재밌는 게 비영리병원인데, 이름만 들으면 여기도 인도주의적 방식으로 돌아가며 공익을 추구하는 곳일 것 같지만 꼭 그렇지가 않다. 비영리병원은 ‘병원 활동을 통해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대가로, 각종 세금 면제 혜택을 받는 의료 기관’을 이야기한다. 정말 다방면에서 세제 혜택이 적용되기 때문에 연간 벌어들이는 매출, 병원이 받는 기부금, 자금 조달을 하기 위해 발행하는 채권 등에서 모두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 그만큼 수입이 많이 찍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지점과 관련해 미국 내에서 논란이 많은 듯 하다. 아무래도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라는 것이 정량적으로 측정되기 어려운 메트릭이다 보니, 비영리병원들이 얼마나 지역 사회에 환원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지도 않은데 무작정 세금을 안 내도록 해주는 것이 맞냐는 지적이 나오는 듯).
그러다보니 여러 대형 병원들이 모여 구성된 준기업체형 의료 브랜드도, 대학 병원들도 모두 스스로를 비영리병원으로 칭한다. 실제로 23년도 2월 기준 미국 내 Net Patient Revenue(순 환자 매출) 상위 5개 병원은 모두 다 비영리병원이었다 (1위 Tisch는 뉴욕대 소속, 3위 Weil Cornell Medical Center는 코넬대 소속, 5위 Vanderbilt University Medical Center는 밴더빌트대 소속-거의 뭐 대학의 캐쉬카우 아닌가?).세제 혜택을 받는 비영리병원들의 매출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1위부터 5위까지의 NPR을 다 더하면 한화 37조원에 이를 정도다. 아직 난 B2B 기업이 어떻게 매출을 내는지 등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보통 얼마 정도를 고객사에게 청구하는지 등) 파이가 크면 클수록 한 참가자가 가져가는 몫이 많아진다는 것 정도는 안다. 미국은 인구 규모 +정부의 기이한 의료 정책이 합쳐져서 무지막지한 크기의 내수 헬스케어 시장이 조성되어버렸고, 이 큰 파이를 다이렉트로 타겟하고 있는 Epic Systems의 몫이 큰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소리다 (반대로 말하면 한국 내에서 Epic의 성공을 그대로 모방하기 어렵다는 이야기 또한 될 수 있겠다).
고객 락인(Lock-In)과 폐쇄적 생태계 조성
Epic은 스티브 잡스의 애플과 유사성을 하나 지니고 있다: 소프트웨어를 만들 때 자신들 제품끼리는 정보 공유가 매우 잘 되는데, 타사 제품이나 인터페이스와는 호환성이 매우 떨어지게 설계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고 한다. A 병원이 에픽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B 병원도 에픽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면 A 병원에서 관리받던 환자가 B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을 때 그 환자의 정보를 움직이는 것이 매우 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B 병원이 타사의 EHR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러기가 어려워진다는 거고. 그러다보니 영향력 있고 큰 병원들이 Epic 제품을 사용한다면 자연스레 다른 병원들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Epic 제품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호환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한 병원이 한번 Epic 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타사 제품으로 바꾸기 어렵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특정 병원이 5년동안 Epic 제품을 사용했다고 가정하면, 이는 5년치 환자의 진료 정보가 모두 Epic 시스템에 담겨 있다는 것이고, 이는 곧 해당 병원이 EHR 시스템을 타사 것으로 바꾸려면 그 5년치 기록을 모두 옮기기 위해 빡센 Integration 과정과 비용을 지불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Epic의 제품들은 매우 높은 락인(Lock-In) 효과를 발휘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sticky한 Epic 제품인데 (한번 붙으면 분리시키기도 어렵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한테도 잘 달라붙는), Epic은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이 태동하기도 이전인 1979년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Cerner 또한 창업 연도가 79년). 위에 말한 속성들과 First Mover Advantage가 합쳐지니 시너지 효과가 엄청나지 않았겠는가.‘병원’이라는 고객의 특수성
위의 Judith Faulkner를 다룬 Forbes 특집 기사에서 인상적인 대목이 하나 있었다. John Glaser라는 전직 Cerner 임원이 헬스케어 시장에 대해 언급한 인터뷰였다.
The move-fast-and-break-things ethos of Silicon Valley doesn’t work in health care. “You can’t tell a doctor it’s okay to fail,” Glaser says. “It’s not okay to fail. That’s death.”
이 문장이 ‘병원’을 고객으로 두는 것의 특수성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비즈니스들은 ‘편리함’과 ‘접근성’이 높은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하는 것에 높은 비중을 둔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기성 산업이더라도 애자일하고 매끄러운 대체품을 만든 스타트업들에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고, 게임의 주도권을 젊은 회사들에게 빼앗길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와비 파커가 안경 산업을 혁신시켰듯이 말이다.
[글로벌 Biz 리더]미국 안경 독점시장 무너뜨린 와비파커
그러나 이런 성공방정식이 헬스케어 비즈니스에서는 쉽사리 먹히지 않는다. 의료 시설들이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것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치료에서의 신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더 좋은 진료/수술 시설과 뛰어난 의사를 보유한 병원에 몰리지 어떤 병원의 예약 과정이 50% 더 빠르고 편하다고 해서 원래 다니던 병원을 버리고 그 병원으로 옮겨가지는 않는다 (건강보험 덕분에 병원비가 싸서 일상적으로 병원을 가는 한국과는 조금 다른 맥락일 수 있다-또한 여기서 이야기되는 병원들은 Epic의 고객이 될 정도로 규모가 큰, 심각한 병들을 다루는 준기업형 병원들임을 기억하자).
또한 병원 자체의 퀄리티 이외에도 미국처럼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에서는 ‘지역성’ 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특정 지역 내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 지역에 있는 대형 병원의 고객이 된 다음 잘 옮기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대표적인 예로 각 주마다 그 주를 대표하는 대학 병원들이 잘 발달되어 있기도 하고.
어쨌든 결론적으로 여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의료업계 내에서 병원 간 고객 유동성은 다른 산업에 비해서 떨어진다는 것이다. 의사들 또한 이것을 잘 알고 있고, 이런 문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 것이다. 위에 언급된 것처럼 의사의 입장에서 제일 중요한 건 환자의 생명과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지 빠르게 혁신의 물결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다보니 ‘병원’이라는 고객군은 좋게 말하면 안정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쉽게 변하지 않는 집단인 것이며, 이는 오늘날 등장하고 있는 수많은 실리콘밸리 헬스케어 스타트업에 맞서 Epic이 시장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보호막으로 작용한다.
이미 수년, 혹은 수십년동안 사용해온 Epic의 제품이 있고, 이 제품으로 그동안 환자들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왔었는데 Epic보다 좀 더 깔끔하고 빠른 제품이 나타난다 해서 굳이 그걸로 갈아탈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겠지. 어차피 그 제품으로 갈아타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환자들이 다른 병원으로 옮겨갈 게 아닌데. 이와 같은 시장의 특수성과 바로 위에서 언급한 제품 특유의 stickiness로 인해 Epic은 현재와 같은 높은 시장점유율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의 관전 포인트는
어차피 Epic은 상장기업도 아니고 앞으로도 아닐 것 같기 때문에 이들의 장래에 대한 진단을 내릴 때는 좀 부담감이 덜하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흡사 미국, 나아가 전세계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의 ‘이무기’와 같다고 말한다. Epic은 50년 가량을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에서 존속해 왔던 기업이다. 그 누구보다 자신들이 타겟하는 고객들을 잘 알고 있으며 각종 상황과 위기에 대응하는 노하우 또한 많이 쌓여 있을 것이다 (실제로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매출이 많이 증가하기도 했음). 마치 1000년간 수행을 거듭해 신성해진 뱀과도 같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이 지금보다 더 가파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몇 가지 과제가 남아 있다. 여의주와도 같은 것이다. 이를 획득할 수 있다면 Epic은 용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지금 뱀과 용 사이 어딘가 쯤에 있는 이무기다.
그렇다면 Epic이 물어야 할 여의주는 무엇인가.
새로운 매출 채널 확보
지금까지도 뛰어난 성적을 보여줬지만, 미국 내 병원들에게 SI적 성격을 띈 EHR 시스템을 제공하는 것으로는 매출이 J커브를 그리기 힘들 것이다. 전체 병원의 개수와 수요는 비교적 변동성이 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물론 고령화가 호재로 작용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기는 하다), 앞으로 가다가는 Oracle-Cerner/기타 빅테크 혹은 스타트업들과 한정된 파이를 놓고 점유율 싸움을 지속적으로 벌이는 형국에 놓일 것이다.
B2B EHR 이외에도 다른 매출 채널(비대면 진료, 의료 용품 커머스 등)을 확보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중요해질 것이란 이야기다. 이미 다양한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의 제품을 출시했으니, 씨앗은 뿌려뒀다. 열매를 어떻게 맺을지를 지켜봐야 한다.
체질 개선에 성공할 수 있는지의 여부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Epic은 실리콘밸리의 혁신 DNA를 지니고 있는 기업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Faulkner라는 침착하고 소신있는 창업주의 결단 하에 꾸준하고 우직한 성장을 이어온 것으로 보이지만, 앞으로는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맞춰 어느 정도 스타트업 정신을 조직 내에 수혈해야 할 듯 싶다. 그러지 않다가는 신흥 기업들의 시장 진입을 방어하는 수동적 입장에 놓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Faulkner의 나이가 많다는 것 또한 좋지 않은 요소다 (물론 본인은 인터뷰에서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경영을 이어갈 것이라고 하셨다). 그의 뒤를 이을 사람이 누구이며, 그 사람이 얼마나 Epic을 시대의 흐름에 맞게 바꿀 수 있을지가 정말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헬스케어 시장 진출을 꾀하는 빅테크와의 관계성
미국의 전통적인 빅테크들이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알 것이다.
[코트라] 미국 빅테크의 헬스케어산업 진출 가속화아마존-원메디컬, 인수소식과 그 배경은?
과연 이들의 공격에 Epic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물론 위에 언급한 ‘병원이라는 고객/의료 시장의 특수성’과 Epic이 지금까지 축적한 데이터가 해자로 작용하여 빅테크과의 경쟁에서도 Epic이 크게 밀릴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 그렇기에 빅테크들도 섣불리 싸움을 걸기보다는 Epic과 협업을 하는 등의 선택을 초기에는 내릴 것이라 생각하고 (도입부의 마이크로소프트처럼). 다만 빅테크가 지닌 막대한 자본 동원력과 기술력을 절대 무시해서는 안된다. 당장 가장 큰 경쟁사인 Cerner만 해도 오라클을 등에 업었으니 자본/기술력에서는 Epic을 압도할 것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Epic이 다가올 디지털 헬스케어 전쟁에서 빅테크들과 어떤 관계성에 놓이게 될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Faulkner나 그 일가가 혹시 회사 경영에서 물러나게 된다면 누가 그냥 Epic을 매각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있는 우리가 Epic Systems를 보며 얻어갈 수 있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Epic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회사들, 특히 스타트업들이 Epic을 보고 ‘기업의 본질’에 관해 배워갈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Epic Systems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기업, 기업의 본질에 충실한 회사다. 매출과 현금 흐름 잘 발생시키고, 화려한 언론플레이나 돈 잔치 벌이지 않고, 분명한 수요가 존재하는 마켓에서 좋은 전략을 펼쳐서 우직하게 몇십년간 꾸준하게 성장하는 회사.
모든 위대한 기업이 실리콘밸리에서 천재 대학 중퇴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수평적인 기업 문화, 젊은 DNA, 큰 투자 라운드, 스타 개발자. 이런 것들 다 좋지만 결국에 성공적인 기업을 만든다는 것은 1. 이익을 내고 2. 오랜 시간 동안 생존하는 것 두 가지가 핵심이다. 나 또한 이런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이번주 글을 쓰면서 좀 뇌피셜과 예측성 문장들을 많이 집어넣었다. 나는 의료업계 전문가도 아니고 의사들의 문화와 고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 혹시 틀린 내용이나 반박할 만한 부분, 질문이 있다면 댓글 혹은 이메일(l.deokhaeng@gmail.com)로 알려주길 바란다. 기꺼이 수용하고 고치도록 하겠다. 논쟁거리를 많이 탄생시키는 글은 가치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무기라는 표현이 정말 딱 들어 맞는 회사네요. 비슷한 사례로 Fusion이라는 레이저커터기가 있는데 CorelDraw라는 디자이너들이라면 치를 떨어 할 극혐 UI의 소프트웨어만을 연동되게 해놔서 도면 파일 좀 간단히 수정하려고 하면 너무 불편해서 그때마다 원본파일을 다른 프로그램(일러스트레이터)으로 열어서 수정하고 다시 가져오게 되는데 이게 정말 비효율적입니다. 디자이너도 엔지니어들도 불편한걸 잘 알지만 워낙 대중적으로 보급된 장비이다 보니 대체품도 없어서 울며겨자먹기로 쓰고 있답니다. 독점시장은 참 독이기도 득이기도 한 것 같아요.
This article offers a deep dive into Epic Systems and its significant impact on the healthcare industry. I appreciate how it covers the complexities of Epic’s software, particularly its role in streamlining electronic health records and enhancing patient care. It's fascinating to see how Epic has become a leader in healthcare technology, but the challenges discussed, like high implementation costs and data integration issues, are critical points that need more attention for the system to reach its full potential.
You can also read more about epic system here
https://www.osplabs.com/epic-syste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