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가와 주식 투자
월가와 실리콘밸리는 각각 미국의 양 끝에 자리하고 있으며, 테크 세계의 엔지니어들은 빌딩 숲의 펀드 매니저들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보여지는 표면적 거리만큼, 스타트업 창업가와 주식 투자는 꽤나 느슨한 연관성을 지닌 두 단어이다.
그러나 최근 몇 주 간 (상장) 주식 투자에 빠져 살면서, 나는 주식 투자가 창업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는 활동이며, 주식을 깊이 탐구하는 사람일수록 더 좋은 창업가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왜 그러한가?
주식을 공부하는 사람은 산업의 밑바닥까지 훑고, 이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낼 수 있는 시각을 길러준다.
좋은 종목(=저평가된 회사)을 찾기 위해서는 앞으로 유망할 것 같은 산업을 몇 가지 선정하고, 그 산업 내부의 밸류체인을 샅샅이 공부해야 한다. 밸류체인의 각 단계들이 어떤 식으로 돈을 벌어들이고, 영업 마진율은 어떻게 되며, 어떤 회사들이 그 단계를 점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공부를 해야만 성장성이 있는 회사를 발굴해내고, 나아가 그 중에서 그 성장성이 주가에 반영되지 않은 곳(=저평가된 회사)들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창업을 할 사람이라면,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주식시장 그 이상의 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밸류체인의 이 단계는 왜 이렇게 영업 마진율이 낮지? 이걸 더 높일 수 없을까?
이 단계에서 돈을 더 벌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왜 아무도 이걸 안 할까?
이 단계는 아직은 초창기이지만 앞으로 훨씬 더 커질 것 같은데? 관련해서 시도해 볼 수 있는 아이디어가 없을까?
이와 같은 질문들에서 비롯된 영감은 자연스레 창업 아이디어로 이어질 수 있다. 창업이란 산업이 전개되는 큰 흐름 속에서 ‘빈 틈’을 포착하고, 그 빈 틈을 가장 잘 메꿀 수 있는 팀을 모으는 일이다. 다양한 섹터와 벨류 체인을 세심하게 연구한 사람이라면 분명히 그 경험을 살릴 수 있다.
레브잇 강재윤 대표는 군 복무 시절 세계 각국의 성공한 스타트업들이 운영하고 있는 사업 모델을 모두 정리한 다음, 그 중에 한국에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한국에 적용하면 성공할 모델을 물색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핀둬둬에 대해 파고들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올웨이즈가 되었다. 주식 투자를 위한 산업 공부와 100% 동일한 일은 아니지만, 결국 산업의 앞단부터 뒷단까지를 여러 번 훑어본 이가 창업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업 전략 수립에 대한 간접적인 고민을 해 볼 수 있다.
애플 주가는 여기서 더 오를까? 아니면 지금 거품이 낀 상태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애플이 현재 추구하고 있는 사업 전략의 성패 여부에 의해 달라진다.
희망적 시나리오: 매출의 아이폰 의존도를 줄이고, 서비스 부문의 기여도를 앞으로도 쭉 높임으로써 더욱 플랫폼 기업에 가까운 모습으로 진화. 비전 프로의 성공, 공간 컴퓨팅 시대를 여는 주역이 되어 또 다시 성장 동력 확보.
절망적 시나리오: 전세계 스마트폰 시장 과포화, 비전 프로에 대한 시장의 미지근한 반응, AI 경쟁 주도권 상실1 등으로 인해 쇠락
투자자가 애플 주식을 매도할 계획이든, 매수할 계획이든, 이들은 합리적인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 먼저 위의 두 시나리오 중 하나가 실제로 일어날 것임을 자기 자신에게 설득시켜야 한다. 설득이 이루어지려면 각 시나리오와 관련된 각종 통계 자료와 기고문, 논문, 에세이, 책을 오가며 굳건한 논리를 설계해야 하고. 일례로 나 또한 몇 달 전 애플의 비전 프로가 어떤 성과를 낼 것인지에 대한 내 나름의 논리를 짜본 적이 있다.
종목을 얼마나 오랫동안 보유하고 있을지에 따라 ‘논리 세우기 과정’의 범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기업 자체에 믿음을 가지고 장기 투자를 할 것이라면 기업의 전반적인 전략에 대한 논리를 세워야 하지만, 기업이 진행하는 특정 신규 사업 및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보고 중/단기 투자를 한다면 그 특정 아이템의 미래에 집중해 예측하면 된다.
어쨌든 이렇게 기업의 전망에 대해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주가와 실적으로써 검증하는 사고 방식은 새로운 제품을 기획하는 PO(Product Owner)/창업가의 마인드셋과 상당히 유사하다. 나는 조금 더 극단적으로 한 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은 ‘가상 창업’을 해보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하고 싶다2.
물론 실무에서 서비스의 모든 부분을 개발하여 고객들에게 소개하고, 매일 매일 유저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과 언론에 공개되는 소식만을 신문 기사를 통해 접하는 것에는 큰 간극이 존재하긴 한다. 그러나 어떤 전략이 시장에서 먹힐지 말지를 추리해 본 다음, 그것이 정말 먹혔다면 왜 먹힌 것인지, 외면당했다면 왜 외면당한 것인지를 분석해보는 과정이 누군가의 몸에 익는다면, 그가 창업자로서 유리한 자질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만큼은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좋은 경영진에 대한 나만의 관점이 형성된다.
어떤 회사가 앞으로 잘 될지를 생각하다 보면, 그 성공의 여부가 순수하게 경영진과 내부 인력의 역량에 달려 있는 경우가 있다. 요즘 계속 지켜보고 있는 월트 디즈니(DIS 0.00%↑)가 대표적인 예시다. 객관적인 산업 트렌드나 매출 구조 등을 살펴보면 앞으로 망할 여지도 충분히 있고 화려하게 재기할 여지도 충분한데.
디즈니가 18-19년도의 폼을 되찾아(<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가 18년도 개봉) 디즈니+ 구독자 수를 팍 늘리고 케이블TV 중심 기업에서 DTC 중심 기업으로 안정적으로 변모할지, 지속된 컨텐츠 제작 실패로 업계 주도권을 넷플릭스에게 완전히 빼앗길지를 가르는 열쇠는 현 CEO인 밥 아이거의 손에 쥐어져 있다. 이는 ‘컨텐츠 제작 역량’이라는 항목이 엄청나게 정성적이고 소비자의 감성, 시대정신, 유행하는 문화 코드 등과 같은 예측불허한 요소들과 엮여있기 때문이다. “이걸 누가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너무나도 달라지는 것.
따라서 디즈니의 미래를 예측하자니 밥 아이거와 현재 경영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밥 아이거의 인터뷰들을 찾아보고, 그가 쓴 자서전을 읽어보고… 이 과정을 거치며 명망있는 경영자들의 과거 성공과 실패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다 보면 “이런 상황이 왔을 때 난 이런 선택을 해야지,” “이런 일을 맡길 사람을 구할 때에는 이런 덕목을 제일 우선해야지”와 같은 규범들이 내 안에 쌓인다. 이렇게 형성된 “좋은 경영진”에 대한 나만의 프레임을 기반으로 특정 회사의 장래에 베팅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고, 몇 달 혹은 몇 년 뒤에 그런 내 결정이 옳은 것이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주식의 가장 재밌는 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좋은 경영자가 되어 좋은 경영진을 구성하는 것은 초기 스타트업에게는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주식을 하며 다양한 스타일의 경영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은 창업자에게 무조건 귀중한 자산으로 남는다.
기초적인 재무 지식을 쌓을 수 있다.
창업가에게 재무 지식(재무제표 작성/읽는 법, 다양한 자금 조달 방법, 현금흐름 파악하는 법 등)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회사의 본질은 장기적으로 흑자를 내는 것이고, 스타트업의 수명은 회사가 흑자를 낼 때까지 버틸 만큼의 자금이 남아있느냐에 직결되기 때문에, 재무 지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창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장에 성공한 중견/대기업과 직원 2~3명으로 시작하는 스타트업이 각각 마주하는 재무적 난관은 매우 다르겠지만, 당신이 어떤 기업의 주식을 분석하기 위해 그 상장사의 분기보고서나 연간보고서를 즐겨 읽게 된다면, 최소한 재무제표가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한 감은 잡을 것이다. 이것만 해도 상당한 소득이다.
여기서 추가적으로 이야기를 얹자면, 요즘에는 스타트업에서 시작하여 IPO에 성공한 기업들이 많다. 이러한 선례들을 공부하는 것은 먼 훗날 당신의 스타트업이 비상장 기업에서 상장 기업으로 전환할 때 참고할 수 있는 많은 가르침을 당신에게 줄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최근에 많은 실리콘밸리 출신 상장 기업들(Robin Hood, Amplitude, DoorDash, 그보다 이전에는 Google, Amazon 등)이 회계상 비용으로 주식 기반 보상(Stock-Based-Compensation, SBC)을 처리한다는 것을 배웠다. 스타트업들이 직원들에게 급여 대신 스톡옵션이나 지분 등을 나눠주는 것이 모두 SBC에 포함되는데, 이는 비용(expense)이라 손익계산서에서는 지출로 잡혀 회사의 이익을 떨어뜨리지만 실제로 현금이 나가는 보상은 아니라(현금 대신 지분을 주기 때문에) 현금흐름을 계산할 때에는 제외된다.
많은 신규 테크 상장사들이 스타트업 시절 뿌렸던 막대한 양의 SBC 때문에 곤란을 겪는 경우가 꽤 있다. 채용한 인력이 많아 그만큼 SBC가 많이 나가게 되면 손익계산서 상 (-)가 (+)를 넘어 적자가 난 것이 되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SBC를 일회성 비용으로 취급하며 SBC 때문에 적자가 난 회사들을 두둔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일회성’ 비용이라던 SBC가 따지고 보면 매 분기, 매 년도마다 찍히고 있다며 회사 주식을 저평가할 근거로 삼기도 한다. 즉, 현명한 CEO라면 상장 이전부터 SBC의 양을 적당히 조절할 고민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마 난 이 사실을 주식 투자를 하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것이다 (SBC 관련 문제가 내 눈앞에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그리고 이러한 정보에 익숙한 창업자와 익숙하지 않은 창업자는 장기적으로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 데 있어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세상이 돌아가는 흐름에 더 밝아진다.
주식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면 빠른 주기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체크해봐야 한다. 거시 경제와 관련된 지표들(물가, 원자재 가격 등)은 기본이고 시사 전반(주요국 정부들의 규제나 정책 등)에 빠삭해야 기회를 포착하고 손실을 줄일 수 있다.
이렇게 세상이 돌아가는 흐름에 민감해지는 것은 매우 피곤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3, 동시에 connecting the dots를 더 빠르게 해낼 수 있고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말보다 예시로 설명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 같은데:
이런 사람이 되는 데 한 발짝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거다. 멋지지 않은가? 사실 이 정도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된다면 더 이상 창업을 할지, VC를 할지, 헤지펀드를 할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긴 하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주식 투자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하면 세상의 더 많은 부분의 메커니즘들에 호기심을 가질 수 있고, 그만큼 넓은 시야를 얻을 수 있다는 것. 투자는 “바위 밑을 들추는 일”이라고 말했던 짐 로저스의 사상과도 연결되는 지점.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나는 가능하다면 주식 투자를 앞으로도 나의 취미 중 하나로 가져가고 싶다. 수익률도 챙기고 많은 공부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챗GPT로 인해 최근 AI 광풍이 전세계를 덮치고 있는 와중, 빅테크 기업 중 거의 유일하게 애플만이 생성형 AI나 AI와 관련된 행보를 보이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는 월가 전문가들이 많다.
워렛 버핏이 “주식을 사는 것은 기업을 사는 것이다” 라고 말한 것과도 같은 맥락.
실제로 난 이 점 때문에 한동안 주식을 하는 것을 멀리했었다. 매일마다 뉴스를 체크하고, 투자한 회사 관련 소식을 확인하는 일이 너무 심리적으로 피곤한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