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3는 지금까지 내가 봐 온 기술 산업 중에 가장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상(Ideology)에 대한 의존도가 현저히 높다는 점이 그것인데, 다시 말해 실체를 지닌 제품이나 애플리케이션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 기술은 이런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하는 사상가나 선언문이 먼저 큰 관심을 받는다는 거다1.
이런 사상가의 말과 글들이 앞장서서 web3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면, 그 방향성에 맞춰 신규 프로젝트들이 론칭되고, 스타트업들에 대한 투자가 집행되며, 코인 가격이 오르내린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비탈릭 부테린의 아이디어 하나하나가 크립토 시장에 얼마나 큰 변화를 불고 왔는지를 떠올려보라. 이러한 특징을 보면 web3는 어쩌면 산업보다는 (아직까지는) 하나의 사회 운동에 더 가까울 수도 있겠다.
그러니 web3의 트렌드를 읽고 예측하기 위해서는 web3 생태계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구루들과 thought leader들의 생각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늘은 그런 thought leader 중 한 명인 크리스 딕슨에 대해 살펴본다. 크리스 딕슨은 두 차례 기업을 매각시킨 경험이 있는 연쇄 창업가이자 2013년에 a16z(안데르센 호로위츠)에 합류한 벤처 투자자로, a16z의 web3 특화 브랜치인 a16z crypto를 창립한 general founding partner이다. 그의 주요 포트폴리오로는 오큘러스, 코인베이스, dYdX, 대퍼 랩스, 유가 랩스 등이 있다.
a16z는 2020년대 초반의 web3/크립토 붐을 주도한(사실상 멱살잡고 캐리한) 플레이어 중 하나다. 한창 버블이 꼈을 때는 이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막대한 양의 투자금을 web3 시장과 초기 스타트업들에 쏟아 부었다.
a16z crypto는 현재 $7.6B 규모의 크립토 전문 투자 펀드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 중 가장 최근에 결성된 $4.5B Crypto Fund 4는 크립토 윈터가 막 시작될 시기인 22년도 5월 말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모든 펀드들을 총괄하는 사람이 바로 크리스 딕슨이다.
web3는 a16z의 영향력 아래에, 그런 a16z는 크리스 딕슨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크립토 윈터 동안 뭘 하고 있었나?
시장이 호황일 때는 누구나 신봉자가 되지만, 시장이 불황일 때는 대부분이 돌아선다. 22년도 연준의 금리 인상과 루나 사태로 인해 시작된 크립토 윈터 기간 동안 우리는 많은 web3 옹호론자들이 조용히 믿음을 버리고 다른 분야로 옮겨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렇다면 web3 혁명의 최전방에 서 있던 크리스 딕슨은 이 기간 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그냥 쭉 web3에 대한 믿음을 지키면서 있었던 것 같다. a16z에서 이전만큼 공격적인 투자를 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web3 관련 기업을 발굴해 냈고, 지난 30일에는 web3가 그리는 청사진을 다룬 책을 냈다. <Read Write Own : Building the Next Era of the Internet>이라는 책으로, 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 만든 The Read Write Own Manifesto라는 제목의 선언문이 a16z crypto 홈페이지에 업로드되어 있기도 하다.
With traditional computers, the hardware controls the software. Hardware exists in the physical world, where an individual or organization owns and controls it.
전통적인 컴퓨터 구조에서는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를 제어했다. 하드웨어는 물리적인 세계에 존재하고, 그곳에서 개인 혹은 단체가 하드웨어를 소유하며 제어한다.
(…)
blockchains are computers that can, for the first time ever, establish inviolable rules in software. This allows blockchains to make strong, software-enforced commitments to users. A pivotal commitment involves digital ownership, which places economic and governance power in the hands of users.
블록체인은, 최초로, 불변하는 법칙을 소프트웨어 안에 심어놓을 수 있는 컴퓨터다. 이 특성으로 인해 블록체인은 사용자들에게 강력하고, 소프트웨어에 의해 강제되는 약속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약속은 디지털 소유권에 관한 것이며, 이는 사용자들의 손에 경제와 거버넌스를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쥐어준다.
- Chris Dixon이 작성한 The Read Write Own Manifesto
인상적일 정도로 이 사람의 web32에 대한 지지는 굳건해 보인다. 딕슨의 믿음이 더욱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돈 때문에 web3를 옹호하는 것이 아님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a16z의 파트너로서 자신이 집행한 web3 관련 투자들이 높은 수익률을 올리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책임이 있지만, 그와 별개로 이미 돈이 많을 사람이다. 2006년, 그리고 2011년에 각각 McAfee와 eBay에 자신이 창업한 회사를 팔았고, 성공적인 시드/엔젤 투자자로 활동하기도 했다3. a16z에서 오큘러스와 코인베이스에 대한 투자를 이끌기도 했으니 챙겨간 성과보수 또한 두둑할 것이다.
그 말인즉슨, 크리스 딕슨이 web3를 열렬히 응원하는 이유는 그가 진심으로 이 세상을 web3가 지향하는 가치와 일치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web3의 비전에는 공감하지만 그 실현가능성에 아직 의문을 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토록 web3가 인터넷의 미래라 주장하는 구루들을 보면 무척 궁금해진다. 과연 이들이 믿게 만드는 동기는 어디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 뿌리에 다가선다면 나도 이들과 같이 강한 신봉자가 될 수 있을까.
언제부터 web3를 믿어왔을까?
크리스 딕슨이 web3와 실체적인 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2013년 그가 a16z로 이직하고 코인베이스에 대한 투자를 집행하면서부터라고 봐야 한다. 그 이전에는 지금처럼 대놓고 블록체인/암호화폐와 연관된 행보를 보인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트코인이 세상에 나온 것이 2009년, 이더리움이 2015년에 만들어졌으니, 2013년에 코인베이스에 베팅을 한 것만 해도 딕슨은 이미 굉장한 선구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코인베이스에 투자하기 이전에도 딕슨은 블록체인이 주창하는 탈중앙화, 소유의 인터넷, 개방된 네트워크 등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딕슨이 블록체인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이미 블록체인이 건드리는 문제들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던 그에게 블록체인이라는 해결책이 때마침 찾아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흔적은 그가 2009년부터 적어오던 블로그 cdixon.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딕슨은 특이하게도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철학 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일반적인 기술자와 다르게 글 솜씨가 뛰어나며 매우 다양한 분야에 대해 깊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블로그도 매우 흥미로운 읽을거리로 넘쳐나며, 그가 괜히 web3 대표 사상가 중 한 명이 된 것이 아님을 증명해준다(실제로 Fortune에서는 딕슨을 Philosopher King of Crypto라고 묘사한다).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의 블로그 글들 중 블록체인과 관련있어 보이지만 직접적으로 블록체인을 언급하지는 않는 것들이 몇 가지 있어 가져와봤다. 시기 상으로도 web3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이전에 적힌 것들이라, 딕슨의 web3를 향한 믿음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가 이어온 생각 위에 지어진 것인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월가가 인터넷의 공격을 받고 무너지는 것 만큼 내가 더 보고 싶은 광경은 없다.
(…)
내가 보기에 월가를 무너뜨리는 최고의 방법은 그들이 지금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는지를 살펴본 다음 그 지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
은행들은 IPO와 대형 인수 합병등의 “서비스 제공”을 통해 많은 돈을 번다. 이를 공격할 수 있는 작은 방법은 기술 기업들(페이스북?4)로 하여금 월가를 거치지 않고 IPO를 하게 설득하는 것이다(이것은 Wit Capital이 하고자 했던 것이다5).
- 어떻게 월가를 무너뜨리는가(How to Disrupt Wall Street), 2010.01.23
오래 전부터 딕슨이 기관과 거대 자본들에 의해 움직이는 경제를 해체시키고 그것을 사람들의 손에 돌려주는 것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 글이다. 이러한 주류 경제의 탈중앙화는 블록체인 진영이 가장 염원하는 것 중 하나다.
지난 몇 년 간, 여러 개의 웹 기반 마켓플레이스들이 많은 인기를 끌었다 - Etsy, 킥스타터, 에어비앤비 등. 이러한 류의 아이디어들 중 대다수는 이미 이전에 시도된 것들이지만, 이제 와서야 성공을 거두고 있다.
(…)
“왜 지금일까(why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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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플레이스는 신뢰(trust)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신뢰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잠재적 거래 대상의 평판을 알아야만 한다. 오늘날,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당신은 거의 모든 잠재적 거래 대상자에 대한 배경 정보를 구글이나 페이스북을 뒤지는 것으로 찾아낼 수 있다. 더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는 마침내 시민들을 위한 인터넷을 가지게 된 것이다.
- 시민들을 위한 인터넷(An internet of people), 2011.12.19
“여기에는 실제로 두 가지 단계의 신뢰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당신이 물건을 구매하고 있는 사람을 알고 믿는 형태의 신뢰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누구로부터 사고 있는지를 모른다면, 두 번째 단계의 신뢰로 넘어가는 것인데, 이는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플랫폼을 알고 믿는지에 관한 것이다.”
(…)
“두 번째 단계의 신뢰”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은 인터넷으로 하여금 수많은 기관들(institutions)의 역할을 대체해버리게 만들었다.
- 신뢰할 수 있는 플랫폼들(Trusting Platforms), 2011.12.20
온라인 상에서 구현될 수 있는 “신뢰”가 수많은 새로운 서비스와 제품의 기반이 될 수 있음을 일찍이부터 알아차린 딕슨의 통찰. 이와 유사하게 비트코인, 그리고 이후에 등장한 이더리움은 알고리즘에 기반한 전자적 신뢰를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다양한 분야에 혁신을 일으켰다.
“인터넷에서, 우리는 이커머스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의 개인정보를 여러 형식에 입력하여 우리 스스로를 개인 정보 도용에 취약하게 노출시킨다.
(…)
오늘날의 컴퓨터들을 그다지 믿을 만 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 인간보다 천문학적으로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그들에게 엄청나게 의존해버리곤 만다. 우리는 컴퓨터와 공용 네트워크가 주는 이익을 차지하는 대가로 아이덴티티 도용/범죄와 점점 늘어가는 수많은 공격들을 감수하는 것이다.
(…)
최근 개발되었고, 계속 개발되고 있는 ‘블록 체인’이라는 기술이 이것을 바꿀 것이다. (…) 이 블록 체인 컴퓨터들은 우리가 훨씬 더 믿을 만 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우리의 중요한 정보들을 온라인에 올려놓을 수 있게 할 것이다.”
- Nick Szabo의 "신뢰 기반 컴퓨팅의 서막”이라는 글을 인용, 2014.12.11
나는 모든 영화들을 애플 TV를 통해서 구입하고, 해적판본에 강하게 반대한다. 그렇지만 나는 해적판본을 구입하는 많은 사람들도 컨텐츠를 구입하고 다운로드하는 과정이 훨씬 쉽기만 했다면 돈을 기꺼이 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서비스를 생각해보자. 모든 비트토렌트 파일에 관해, 각 파일에 대응되는 비트코인 지갑을 만드는 거다. 사람들이 토렌트 파일을 다운로드 받을 때마다, 그들로 하여금 연결된 비트코인 지갑에 비용을 지불하도록 독려하자. 그리고 파일의 창작자가 그렇게 지불된 비트코인을 가져가는 거다. 나는 이러한 방법이 컨텐츠 크리에이터들을 위해 상당한 수입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 별로 글로벌하지 않은 인터넷(“The Not so Global Internet”), 2014.12.27
비교적 최근인 2014년에 쓰여진 글들로, 그가 코인베이스에 투자를 한 직후의 작품들이다. 본격적으로 그가 이전부터 지녀왔던 문제의식들을 어떻게 블록체인을 이용해서 해결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한 모습이다. 특히 비트토렌트와 비트코인을 엮어서 크리에이터들을 돕고자 한 아이디어는 매우 인상깊은데, 이 글이 쓰여졌을 때가 아직 NFT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임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처럼 web3에 대한 딕슨의 믿음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닌 1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형성된 열정과 고뇌의 결과물이다. 그는 비트코인과 web3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천편일률적인 네트워크와 중앙집권형 기관이 움직이는 사회에서 탈피하는 법, 인터넷에서 신뢰를 구축하는 법,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고 사람들에게 권력을 되돌려주는 법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고, 이 모든 것과 맞닿아있는 블록체인에 매료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web3는 이 사람에게 있어 의심과 토론의 대상이 아닌 마땅히 이 세상이 거쳐가야 할 단계인 것이고, 그러한 확신은 단기적으로 겨울이 오든 하락장이 오든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아직도 web3는 갈 길이 매우 멀기 때문에 딕슨의 믿음이 옳았던 것인지를 알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의 사례에서 배워갈 수 있는 점이 있다.
스스로에게 걸맞는 종류의 믿음이 있다.
하나의 작은 문제에서 시작하는 bottom-top 식의 혁신이 있고, 큰 그림을 예측하여 세부적으로 파고드는 top-bottom 식의 혁신이 있다. 만약 top-bottom 식의 혁신을 이루려는 사람이라면 어떤 종류로든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된다(ex: LLM이 제조업계를 뒤집어 놓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때 스스로에게 어떤 믿음을 무의식적으로 강제하거나 설득 당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해서 생긴 믿음은 피상적일 뿐만 아니라, 별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겨울이 찾아왔을 때 포기하지 않도록 막아주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내가 정말 다양한 경험과 고민을 하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내가 믿음을 찾아나서기 전에 믿음이 먼저 날 찾아올 것이다. 크리스 딕슨에게 블록체인이 찾아왔고, 그 뒤부터 그가 거침없이 나아간 것처럼. 정말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믿음은 나의 가치관, 성향과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내가 의심하지도 않을 그런 것이다.
그러니 결국 중요한 건 배움을 멈추지 않고,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가능한 모든 옵션을 탐색해서 나와 잘 맞는 믿음과 맞닥뜨리기를 기다려야 한다.
마크 주커버그는 페이스북을 세상에 퍼뜨리기 위해 web2.0이 필요하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선언문을 굳이 쓰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위 글에서 언급되는 digital ownership이 포함된 웹의 단계를 web3라고 한다.
Founder’s Collective라는 시드 스테이지 벤처 펀드를 공동 창립했는데, 이들의 포트폴리오 중 쿠팡도 포함되어 있다.
아직 페이스북이 IPO하기 이전이다.
Wit Capital은 오늘날의 크라우드펀딩과 유사하게 기업들이 온라인에서 공모주를 판매하여 IPO를 할 수 있게 도우려던 회사다. 90년대의 회사지만 골자는 오늘날 이뤄지는 ICO나 DAO 등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 내용에 동의합니다.
'스스로에게 어떤 믿음을 무의식적으로 강제하거나 설득 당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해서 생긴 믿음은 피상적일 뿐만 아니라, 별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겨울이 찾아왔을 때 포기하지 않도록 막아주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믿으려고 노력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그저 믿게 될 뿐입니다. 물론 이를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와 깨달음이 있었을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