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을 하나 하자면, 나는 영화를 비롯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최근에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를 감명깊게 봤고, 이 영화의 성공 뒤에 있는 회사인 A24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좀 파봤고, A24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할리우드 영화 산업계를 disrupt하고 있는 스타트업같은 스튜디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번주는 이렇게 내가 A24에 대해 배운 점들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무엇을 하는 회사인가?
미국의 영화/TV 시리즈 스튜디오로 제작과 배급을 둘 다 하고 있다. 2012년에 다니엘 카츠, 데이비드 펜켈, 존 호지스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중 다니엘 카츠는 A24를 설립하기 이전 구겐하임 파트너스의 영화 투자 부문의 팀장을 맡은 이력이 있고, 이 덕분인지 A24를 세울 때 구겐하임으로부터 시드 머니를 받았다.
구겐하임 파트너스는 미국의 재벌 가문인 구겐하임 가문의 자산을 굴리기 위한 패밀리 오피스에서 시작한 투자 회사로, LA 다저스를 비롯한 다양한 스포츠/엔터테인먼트 브랜드에 투자를 집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참고로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세운 것도 이 가문이다.
미술관에서 운용사, 그리고 스포츠까지?
A24는 전통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는 다른 인디 계열의 영화를 주로 제작한다. 미국 내 소수인종이나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다양성 영화 또한 많이 만든다. 소재만 들으면 대중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A24가 주목받는 이유는 이들의 대표작들이 작품성, 개성과 더불어 대중적인 인기와 유행몰이 또한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도 많이 벌어들인 건 당연하고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글로벌 수입 1억 4천만 달러).
예를 들자면 플로리다 프로젝트, 미나리,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더 웨일, 유포리아, 더 아이돌, 미드소마 등이 모두 A24의 작품이다.
[무비온에어] A24의 안목, 품질보증마크가 되다…흔치 않은 소재·공감 가는 스토리
왜 특별한가?
A24는 유니콘 기업이다. 22년 3월에 VC인 Stripes Group(주요 포트폴리오는monday.com, RapidAPI, 그럽헙, GoFundMe 등)과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누버거 버먼으로부터 $225M(한화 약 3천억원) 상당의 지분 투자를 받았는데 이때 받은 밸류에이션이 $2.5B(한화 약 3조원) 이었다. 그만큼 앞으로 더 상장할 여지가 충분. 애초에 Stripes Group은 소비자/IT 제품 회사에 투자하는 VC인데 이런 곳이 영화 스튜디오에 거액을 넣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영화 산업 자체가 비교적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만큼).
A24 Scores $225 Million Equity Investment, $2.5 Billion ValuationA24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면 영화사가 아니라 무슨 패션 브랜드 홈페이지를 방문한 듯한 기분이 든다. 굉장히 힙하고 개성이 강하다. 홈페이지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A24는 자신들의 영화 뿐만 아니라 회사로서의 A24를 하나의 브랜드로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젊은 세대들이 열광할만한 로고와 머치(Merch)를 제작해서 판매하고, 인스타그램과 틱톡 등의 SNS에서 팬들과의 활발한 소통을 진행한다. 굳이 비교해보자면 백종원 같은 존재인 것이다 (자신이 만든 브랜드들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하나의 상표가 되어버린, 믿고 보는 xxx).
A24 자체가 브랜드가 되었다는 것은 A24라는 스튜디오의 독자적인 팬 베이스가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팬덤을 기반으로 이들은 최근에 A24 구독제 멤버십을 출시하기도 했다. A24 All Access라고 불리는 이 멤버십은, 1달에 $5이고 1년에 $55인데, 가입하면 A24 잡지를 받아보고, 머치 등을 할인된 가격에 먼저 살 수 있으며 IRL 이벤트들에 초청받을 수 있다.
여러모로 이런 A24의 시도는 영화 업계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브랜드 플레이를 하고 강력한 팬베이스를 지닌 영화 배급/제작사가 있었던가?
”A24는 비평이나 흥행에서 최고작을 배출해서가 아니라 영화사의 필모그래피를 묶는 정체성을 수립하고 각인시켰으며 디즈니, 마블, 넷플릭스 같은 거대 브랜드 틈바구니에서 관객과 공유하는 취향의 세계를 짓고 가꾸어냈기에 성공한 스튜디오다." - 씨네 21 김혜리
성공방정식은
개성있고 재능있는 영화인들의 선순환 → A24가 좋은 작품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었던 비결은 전적으로 감독과 제작진에게 최대한의 자유도를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아직 거물이 아니지만 재능이 보이는 어린 감독들을 적극 기용하기도 했다고. 얼마전에는 17살짜리 소년이 유튜브에 올린 Backroom 단편 영화가 큰 화제가 되자 그와 계약하여 공포영화 제작을 맡기기도 했다.
17살 소년이 만든 유투브 호러 시리즈 > A24 장편 영화로 제작
너무 당연한 소리지만 이렇게 인재를 대하는 태도는 예술인들의 유입에 있어 선순환을 만들 수 밖에 없다. 한번 A24에서 좋은 제작 경험을 한 감독이 주위 재능 있는 다른 사람들을 데려오고, 또 그 사람들이 잘 되고. 잘 된 사람들은 영화계에서 점점 영향력을 지니게 될 것이고. 이런 사이클이 계속 반복. 약간 YC Alumni의 결집력과 파워가 YC에 큰 이득이 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듯.스튜디오 자체의 브랜드화 성공 → 고객들의 충성도가 높아진다. A24의 팬들은 특정 세계관이나 시리즈의 팬이 아닌 A24 그 자체의 팬이기 때문에 특정 영화가 잘 안되거나 실패하더라도 리스크가 적다. 그렇기에 더 많은 실험을 진행할 수 있고, 할리우드식 시리즈 우려먹기나 세계관 끌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 (트랜스포머, 최근의 마블처럼).
저예산 다작 → 요즘 슈퍼스타들이 많이 나오는 더 아이돌같은 작품을 만드는 것 보면 A24도 점점 스케일 크고 주류와 가까운 영화들에도 손 대고 있는 것 같지만, 일단 이들은 본질적으로 인디 영화 스튜디오이다. 인디 영화의 장점은 제작비가 적게 들고 빨리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렇기에 A24는 다른 거대 스튜디오들에 비해 더 많은 작품을 한 해에 뽑아낼 수 있고, 이 들 중 몇 편만 대중적으로 성공해도 마진을 남길 수 있다. 어떻게 보면 A24는 VC, 기존의 거대 스튜디오들은 PE같은 것.
”With far lower budgets, somewhere between $15-$20 million on average, A24’s strategy has paid off. Their ethos of trusting their talent and giving them full creative freedom means that they can take more chances. Although not every film will achieve commercial success, their track record indicates that another will. Compared with a larger, more traditional studio that needs the vast majority of its films to be commercially successful in order to be profitable, A24 only needs one or two commercial hits per year. A box office hit like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140.2 million) could finance a full year of more than half of their slate.” - A24’s Not-So-Secret Recipe for Success, Frame.io insider
무엇을 배워갈 수 있을까?
결국 A24의 성공은 롱테일의 승리이자 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 넷플릭스가 OTT의 시대를 열자 영화를 보는 행위는 보다 개인적인 행위가 됨(집에서 혼자 보고 싶은 걸 볼 수 있음)과 동시에 더욱 개성 표출적인 행위가 되었다 (극장을 가는 것이 경제적/심리적으로 부담이 되자 사람들이 비교적 의미있고 자기표현과 밀접한 영화를 보려고 함). A24는 이런 시대적 흐름을 제대로 탄 것이다.
무엇보다 남들과 다른 자신의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소비가 중요한 이 시대에 마이너한 것이 결국 메이저하다는 것을,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것을 보여준 사례. 앞으로 이런 현상이 영화 뿐만 아니라 다른 컨텐츠 분야에서도 많이 등장할 것이다. 책(Substack?), TV 시리즈, 음악, 패션, 게임(게임…은 이미 밸브에서 증명한 것 같기도) 등등. 여기서 어떤 새로운 기회를 포착할 수 있을지 고민해볼 만 하다.지난주 애플 뉴스레터에서 마이너 → 메이저의 변환을 이끌어낼 수 있는 회사가 큰 성공을 거둔다고 이야기했었는데, A24 또한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무언가 마이너한 것의 강자가 되어 그것을 메이저로 가지고 온다는 것은 성공을 못할 수가 없는 구조다. 애초에 마이너하다는 것은 경쟁자가 적다는 뜻. 근데 그걸 메이저로 가져오면 시장이 큰 것이니 독점을 하기도 쉬워짐, 어떻게 보면 피터 틸이 이야기하는 0 to 1 정신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 K리그 (국내 축구 리그) 평균 실관중 1만명이라는 실적을 만들어는 것에 쿠팡플레이의 기여가 컸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었다.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 가장 주목받는 OTT는 쿠팡플레이다. 지난달 30일까지 K리그1 경기장을 찾은 관중이 평균 1만323명으로 집계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가 쿠팡플레이의 중계라고 꼽힐 만큼 만족도가 높다. K리그 팬들이 '갓팡'이라고 부를 정도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지난해 쿠팡플레이와 독점 중계 계약을 체결할 때만 해도 걱정하는 시선이 주를 이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경기장에 카메라 17대를 설치해 방송의 질을 높이고 경기 전 프리뷰 쇼, 하프타임 쇼 등을 진행하며 K리그 팬들을 사로잡았다.
한 축구계 관계자는 "쿠팡플레이를 통해 K리그를 접한 뒤 현장에 방문하는 팬이 많다. 프리미어리그와 세리에A 등을 보며 높아진 축구 팬들의 눈을 쿠팡플레이 중계가 만족시킬 줄 몰랐다"며 "평균 관중 1만명이라는 봄날이 K리그에 찾아오는 데 쿠팡플레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쿠팡플레이는 포뮬러 원(F1)과 북미하키리그(NFL) 등 한국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종목까지 중계 서비스를 공격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쿠팡플레이 관계자는 "축구 팬들을 포함해 구독자 전체를 만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서비스를 개선하고 확장시킬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 [매일경제] 호불호 적고 충성도 높아 … 스포츠 영역 넓히는 OTT
이런 사례 또한 어떻게 보면 마이너 → 메이저로의 변환을 상당히 잘 이끌어낸 케이스 아닐까. 어떤 산업군이 마이너 → 메이저 변환에 적절한지, 그리고 그 변환을 어떻게 이뤄낼지에 대한 노하우가 잘 잡혀있는 사람이 되자. 그럼 성공에 가까워질 것이다.
끝마치며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어서 진지하게 영화 감독이 될까를 고민해본 적이 있다. 아마 내가 스타트업과 IT에 꽂히지 않았다면 정말 그 길을 걸었을 수도 있다. A24 같은 회사를 보니 영화를 꼭 내가 직접 만들지 않더라도 뛰어난 창작가들에게 기회와 자본을 제공해 멋진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는 업도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생충' 작품상 수상 소감 발표한, 이미경 CJ 부회장은 누구?
대충 이런 비슷한 사람이 되는 것.
평소 좋아하는 회사에 대한 글이라 더 주의깊게 읽게됬습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 ✨
좋은 글 감사합니다!